'詩'에 해당되는 글 105건
- 2013.12.20 빛의 무게 - 배창환
- 2013.12.19 유월 소낙비 - 박성우
- 2013.11.21 뉴욕행-김사인
- 2013.11.20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2013.11.20 조용한 일
- 2013.08.15 마네킹 - 이장욱
- 2013.08.13 결정 - 이장욱
- 2012.09.04 저녁 일곱 시
- 2012.01.01 아버지의 이
- 2011.12.24 혜화역 4번 출구
- 2011.12.24 아현동 블루스
- 2011.12.24 흑앵
- 2011.11.13 심보선 '인중을 긁적거리며' 중에서
- 2011.11.06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2011.05.26 노을
- 2010.12.02 아버지의 모자
- 2010.12.02 피터래빗 저격사건
- 2010.12.02 허공과 구멍
- 2010.12.02 밥 먹는 풍경
- 2010.12.02 길 한 토막
청개구리 울음주머니에서 닥다글닥다글 굴러 나오는 청매실,
소낙비가 왁다글왁다글 닥다글닥다글 왁다글닥다글 자루에 담아간다
현대시학 7월호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잃은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바람이 바람을 넘쳐 플래카드를 흔들고
잎 넓은 나무가 잎 넓은 나무를 넘쳐 푸르른 날
나는 경건하였다.
나는 불순한 상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완벽하게 나를 조절하였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당신이 바라볼 때마다
나의 침묵은 부활한다.
나의 시선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격렬한 밤이 당신을 지나갈 때도
나는 기하학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내 시선 끝에 서 있는 대우아파트
나는 그의 정지 자세를 이해한다.
피고 지는 것들은 지겨워.
나는 서서히 낡아갈 것이며
나의 최후는 단호하다.
플래카드 아래로 당신이 당신을 넘치며 걸어온다.
당신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와 긴 그림자를 이룰 때
잠시 공중에 머물렀던 낙엽이
당신의 배후를 횡단한다.
당신은 혼자 고개를 흔든다.
나는 당신이 지겹다.
결정
이장욱
아침에 깨어나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다.
사소한 돌멩이들이 차갑게 침묵할 것이다.
사물들은 후퇴할 것이다.
나는 약속을 취소한다.
세면과 식사 준비와 출근을 취소한다.
창문이 얼어붙는다.
바깥과 안의 대기가 격렬하게
단단한 물방울을 만들고 있다. 서서히
모든 것이 정지한다.
이제 유리는 어느 먼 곳의 금속,
어지러운 지평선에서 이상한 마음이 불어온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반성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는 신비로운 과거가 없으며,
나에게는 늙으신 아버지가 있으며,
나는 오로지 지금 이곳에 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시작된다.
단 하나의 생각이
나를 결박한다.
나는 얼어붙는다.
오 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온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나도 하루 종일
어떤 생각이란 것에 매달린 셈이다
한동안 뜨겁게 나를 지나간
끝내 내 것 아니었던 사랑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
*
저녁 일곱 시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벌겋게 타오르던 노을이
쇠잔해져 어둠에 사그라지는 것만 봐도 안다
마지막 네 눈빛이 그러하였다
(엄원태 '저녁 일곱 시'의 2, 4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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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
뿌리 드러낸 고목처럼
하나 남은 아버지의 이,
우리 가족이 씹지 못할 것 씹어주고
호두알처럼 딱딱한 생 씹어 삼키기도 했던
썩은 이가
아직도 씹을 무엇이 있는지
정신을 놓아버린 채 든 잠 속에서도
쓸쓸하게 버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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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大地)의 소작(小作)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 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월간 '문학사상' 2010년 5월호 발표)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
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불현듯
쇼윈도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 벌 훔쳐 입고 싶네 나는
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
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살이라도 차린다면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네 거짓말처럼
신랑이 어줍은 몸짓으로 밤낮 스으윽사악 스으윽사악
토막 난 나무를 다듬어 작은 밥상 하나를 지어내면
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시를 쓰리 아아 아현동, 으로 시작되는
주린 구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겠지 그러면
파지처럼 구겨진 판잣집 지붕 아래
진종일 품삯으로 거둔 톱밥이 양식으로 내려 밥상을 채울 것이네
날마다 우리는 하얀 고봉밥에 배부를 것이네
아아 그러나 나는 비련의 신부, 비련의
아현동을 결코 시 쓸 수 없지 외팔의 뒤틀린 손가락이
식은 밥상 하나 온전히 차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 동네를 아는 누구도 끝내 행복할 수는 없겠네
영혼결혼식 같은 쓸쓸해서 더욱 찬란한 웨딩드레스 한 벌
쇼윈도에 우두커니 걸려 있고 그 흘러간 시간의 언저리
도시를 떠나지 못한 혼령처럼 서 있네 나는
(계간 '창작과 비평' 2010년 가을호 발표)
크고 위대한 일을 해낼 듯한 하루이므로
화분에 물 준 것을 오늘의 운동이라 친다
저 먼 사바나 초원에서 온 비와 알래스카를 닮은
흰 구름떼를
오늘의 관광이라 친다
뿌리 질긴 성격을 머리카락처럼 아주 조금 다듬었음을
오늘의 건축이라 친다
젖은 우산 냄새를 청춘이라 치고 떠나왔음을
해마다 한겹씩 둥그런 필름통 감는 나무들이
찍어두었을 그 사진들 이제 와 없애려 흑백의 나뭇잎들
한 장씩 치마처럼 들춰보는 눅눅한 추억을
오늘의 범죄라 친다
다 없애고도 여전히 산뜻해지지 않은 해와 달을
오늘의 감옥이라 친다
노란무늬 붓꽃을 노랑 붓꽃이라 칠 수는 없어도
천남성을 별이라 칠 수는 없어도
오래 울고 난 눈을 검정버찌라 칠 수는 없어도
나뭇잎속 스물 두 살의 젖은 우산을 종일 다시 펴보는
때늦은 후회를
오늘의 위대함이라 치련다
(계간 '시안' 2010년 여름호 발표)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 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 없는 인생을 살았다
(중략)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천사는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