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alc
,
청개구리가 울음주머니에서 청매실을 왁다글왁다글 쏟아낸다

청개구리 울음주머니에서 닥다글닥다글 굴러 나오는 청매실,

소낙비가 왁다글왁다글 닥다글닥다글 왁다글닥다글 자루에 담아간다



현대시학 7월호
Posted by calc
,

 

 

Posted by calc
,

 

 

Posted by calc
,

조용한 일

카테고리 없음 2013. 11. 20. 01:22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잃은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Posted by calc
,

바람이 바람을 넘쳐 플래카드를 흔들고

잎 넓은 나무가 잎 넓은 나무를 넘쳐 푸르른 날


나는 경건하였다.

나는 불순한 상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완벽하게 나를 조절하였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당신이 바라볼 때마다

나의 침묵은 부활한다.

나의 시선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격렬한 밤이 당신을 지나갈 때도

나는 기하학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내 시선 끝에 서 있는 대우아파트

나는 그의 정지 자세를 이해한다.

피고 지는 것들은 지겨워.

나는 서서히 낡아갈 것이며

나의 최후는 단호하다.


플래카드 아래로 당신이 당신을 넘치며 걸어온다.

당신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와 긴 그림자를 이룰 때

잠시 공중에 머물렀던 낙엽이

당신의 배후를 횡단한다.

당신은 혼자 고개를 흔든다.

나는 당신이 지겹다.


Posted by calc
,

결정



이장욱



아침에 깨어나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다. 

사소한 돌멩이들이 차갑게 침묵할 것이다. 

사물들은 후퇴할 것이다. 


나는 약속을 취소한다. 

세면과 식사 준비와 출근을 취소한다. 

창문이 얼어붙는다. 

바깥과 안의 대기가 격렬하게

단단한 물방울을 만들고 있다. 서서히

모든 것이 정지한다. 

이제 유리는 어느 먼 곳의 금속,

어지러운 지평선에서 이상한 마음이 불어온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반성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는 신비로운 과거가 없으며,

나에게는 늙으신 아버지가 있으며,

나는 오로지 지금 이곳에 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시작된다. 

단 하나의 생각이 

나를 결박한다. 

나는 얼어붙는다.

오 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온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Posted by calc
,

나도 하루 종일
어떤 생각이란 것에 매달린 셈이다
한동안 뜨겁게 나를 지나간
끝내 내 것 아니었던 사랑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 

*

저녁 일곱 시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벌겋게 타오르던 노을이
쇠잔해져 어둠에 사그라지는 것만 봐도 안다
마지막 네 눈빛이 그러하였다

 

(엄원태 '저녁 일곱 시'의 2, 4 연)

---
Posted via posterous.com http://pilhoon.posterous.com/158747051


Posted by calc
,

강경호


뿌리 드러낸 고목처럼
하나 남은 아버지의 이,
우리 가족이 씹지 못할 것 씹어주고
호두알처럼 딱딱한 생 씹어 삼키기도 했던
썩은 이가
아직도 씹을 무엇이 있는지
정신을 놓아버린 채 든 잠 속에서도
쓸쓸하게 버티고 있는가

 

---
Posted via posterous.com http://pilhoon.posterous.com/91501492

Posted by calc
,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大地)의 소작(小作)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 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월간 '문학사상' 2010년 5월호 발표)
Posted by calc
,
박소란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
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불현듯
쇼윈도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 벌 훔쳐 입고 싶네 나는
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
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살이라도 차린다면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네 거짓말처럼
신랑이 어줍은 몸짓으로 밤낮 스으윽사악 스으윽사악
토막 난 나무를 다듬어 작은 밥상 하나를 지어내면
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시를 쓰리 아아 아현동, 으로 시작되는
주린 구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겠지 그러면
파지처럼 구겨진 판잣집 지붕 아래
진종일 품삯으로 거둔 톱밥이 양식으로 내려 밥상을 채울 것이네
날마다 우리는 하얀 고봉밥에 배부를 것이네
아아 그러나 나는 비련의 신부, 비련의
아현동을 결코 시 쓸 수 없지 외팔의 뒤틀린 손가락이
식은 밥상 하나 온전히 차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 동네를 아는 누구도 끝내 행복할 수는 없겠네
영혼결혼식 같은 쓸쓸해서 더욱 찬란한 웨딩드레스 한 벌
쇼윈도에 우두커니 걸려 있고 그 흘러간 시간의 언저리
도시를 떠나지 못한 혼령처럼 서 있네 나는


(계간 '창작과 비평' 2010년 가을호 발표)
 
Posted by calc
,

흑앵

카테고리 없음 2011. 12. 24. 01:42
김경미


크고 위대한 일을 해낼 듯한 하루이므로

화분에 물 준 것을 오늘의 운동이라 친다
저 먼 사바나 초원에서 온 비와 알래스카를 닮은
흰 구름떼를
오늘의 관광이라 친다
뿌리 질긴 성격을 머리카락처럼 아주 조금 다듬었음을
오늘의 건축이라 친다

젖은 우산 냄새를 청춘이라 치고 떠나왔음을
해마다 한겹씩 둥그런 필름통 감는 나무들이
찍어두었을 그 사진들 이제 와 없애려 흑백의 나뭇잎들
한 장씩 치마처럼 들춰보는 눅눅한 추억을
오늘의 범죄라 친다
다 없애고도 여전히 산뜻해지지 않은 해와 달을
오늘의 감옥이라 친다

노란무늬 붓꽃을 노랑 붓꽃이라 칠 수는 없어도

천남성을 별이라 칠 수는 없어도

오래 울고 난 눈을 검정버찌라 칠 수는 없어도

나뭇잎속 스물 두 살의 젖은 우산을 종일 다시 펴보는
때늦은 후회를
오늘의 위대함이라 치련다


(계간 '시안' 2010년 여름호 발표) 
Posted by calc
,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 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 없는 인생을 살았다

(중략)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천사는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Posted by calc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Posted by calc
,

노을

카테고리 없음 2011. 5. 26. 11:46
김명배

 
Posted by calc
,
이시영


 아버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따르던 오촌당숙이 아버지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아버지가 평소에 쓰시던 모자를 들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모자를 쓰고 사립 밖으로 걸어 나가시는 것이었다.

Posted by calc
,

피터래빗 저격사건
-의뢰인


유형진



 나에겐 고향이 없지 고향을 잃어버린 것도, 잊은 것도 아닌, 그냥 없을 뿐이야 그를 만난 건 내가 Time Seller Inc. 라는 회사에서 일할 때였지 그곳은 시간이 없는 자들에게 시간을 파는 일을 해 그것은 불법이었지 그곳의 시간들은 대부분 훔친 것들이거든 나는 시간의 장물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지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시간을 사줄 수 없겠냐고 문의를 해왔어 그는 오자마자 고향 이야기를 꺼냈어 그의 고향은 남쪽의 바닷가 마을이었는데 고향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의 시간을 팔고 싶다고 했어 들어보니 사줄 가치도 없는 흔해빠진 시간을 들고 와선 아주 비싼 가격을 부르더군 그는 벨벳정장 차림에 고급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눈동자가 깊었어 그냥 돌려보내려다가 그런 시간 한 개쯤 사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지 혹시 팔리지 않는다면 내가 써볼 생각이었지 그래서 그의 시간을 헐값에 샀어 아무도 사가지 않은 그의 시간을 쓰겠다고 한 순간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지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신호등을 기다리다가도 깜박깜박 잠이 들었어 끝내는 눈을 뜨고 꿈을 꾸며 걷게 되었지 꿈꾸며 걷는 길가엔 은갈치떼가 몰려다니고 해초들이 발목을 감싸서 걸을 수가 없었지 나는 예전의 고향 없는 내가 그리워졌어 그때의 평화로움은 다시는 나를 찾아와주질 않았지 구입한 시간은 되팔 수 없었어 그것이 이 일의 룰이거든 그를 찾으면 꼭 보름의 달무리 진 풀밭으로 데려가야 해 그가 판 유년의 시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그곳에서 부탁해.





Posted by calc
,
오규원


 나무가 있으면 허공은 나무가 됩니다
 나무에 새가 와 앉으면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됩니다
 새가 날아가면 새가 앉았던 가지만 흔들리는 나무가 됩니다
 새가 혼자 날면 허공은 새가 됩니다 새의 속도가 됩니다
 새가 지붕에 앉으면 새의 속도의 끝이 됩니다 허공은 새가 앉은 지붕이 됩니다
 지붕 밑의 거미가 됩니다 거미줄에 날개 한쪽만 남은 잠자리가 됩니다
 지붕 밑에 창이 있으면 허공은 창이 있는 집이 됩니다
 방 안에 침대가 있으면 허공은 침대가 됩니다
 침대 위에 남녀가 껴안고 있으면 껴안고 있는 남녀의 입술이 되고 가슴이 되고 사타구니가 됩니다
 여자의 발가락이 되고 발톱이 되고 남자의 발바닥이 됩니다
 삐걱이는 침대를 이탈한 나사못이 되고 침대 바퀴에 깔린 꼬불꼬불한 음모가 됩니다
 침대 위의 벽에 시계가 있으면 시계가 되고 멈춘 시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허공은 사람이 되지 않고 시체가 됩니다
 시체가 되어 들어갈 관이 되고 뚜껑이 꽝 닫히는 소리가 되고 땅속이 되고 땅속에 묻혀서는 봉분이 됩니다
 인부들이 일손을 털고 돌아가면 허공은 돌아가는 인부가 되어 뿔뿔이 흩어집니다
 상주가 봉분을 떠나면 묘지를 떠나는 상주가 됩니다
 흩어져 있는 담배꽁초와 페트병과 신문지와 누구의 주머니에서 잘못 나온 구겨진 천 원짜리와 부서진 각목과 함께 비로소 혼자만의 오롯한 봉분이 됩니다
 얼마 후 새로 생긴 봉분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달라져 잠시 놀라는 뱀이 됩니다
 뱀이 두리번거리며 봉분을 돌아서 돌 틈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사라지면 허공은 어두운 구멍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 앞에서 발을 멈춘 빛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을 가까운 나무 위에서 보고 있는 새가 됩니다







Posted by calc
,
안주철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 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 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갈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
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
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
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 병일 때
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
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리 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이런 때
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





Posted by calc
,

길 한 토막

카테고리 없음 2010. 12. 2. 16:16


물고기들이 여자의 종아리를 베고 흐른다
물의 방향을 따라 매끄럽게, 물을 거슬러
거칠게 무릎까지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
예리한 물의 비늘, 아찔하여 눈을 감으면
촬촬, 물소리가 여자의 기억을 거슬러 오른다
서늘하고 가슴 설레는, 언젠가 한 번 와봤던,
소년과 마주치는 짧은 길의 시간


- 신영배 '길 한 토막' 중에서

Posted by calc
,